1. 산업화 속에 피어난 삶의 빛
1970년대의 한국은 빠르게 달리기 시작한 열차와도 같았다. 가난했던 농촌을 떠나 수많은 청춘들이 도시의 공장으로 몰려들었다. 아침 6시에 울리는 기상 사이렌, 허겁지겁 달려간 노동집합소에서 하루 12시간씩 일하며, 그들의 손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그런 시대에도 사람들은 ‘빛’을 찾았다. 바로 금과 보석이었다. 낡은 도시 뒷골목의 조그마한 금은방은 그 시대 청춘의 ‘꿈’이 걸려 있던 곳이었다. 월급봉투를 쥐고 몰래 들른 금은방에서 남자는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꺼냈다. “손가락에 맞출 수 있을까요?”
2. 금반지, 결혼보다 진지했던 ‘약속’
당시엔 결혼을 약속하는 방식도 지금과는 달랐다. 약혼반지 하나가 두 사람의 미래를 책임져야 했다. 주말에 도회지로 올라온 여자친구와 명동 골목을 걷던 어느 날, 남자는 수줍게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18K 금반지 하나가 고단한 공장생활의 전부이자, 사랑의 증명이었다. “월급 6개월 모아서 산 거야.”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봤고, 그날의 하늘은 유독 맑았다. 금반지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단한 삶의 위로였고,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서툰 다짐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 금은방은 사람들의 감정이 오고 가는 장소였다. 반지를 사고, 끼우고, 다시 팔기도 했다. 인생의 시작과 끝에 늘 금이 있었다.
3. 1970~80년대 보석산업의 부흥
한국의 보석산업은 1970년대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을지로, 종로 3가, 남대문 일대의 금은방들은 단순한 상점이 아니라 장인의 손끝이 살아 숨 쉬는 ‘작업장’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황폐했던 경제 속에서, 금과 은은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산이었다. 1975년 한국 최초의 보석 전시회가 서울에서 열렸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의 보석은 **‘산업’**이자 **‘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여성들이 결혼식에 꼭 금반지나 진주 목걸이를 착용했던 것도 이런 문화의 연장선이었다.
4. 여성과 보석 ‘사치’가 아닌 ‘위로’의 이름
공장에서 14시간씩 일하고 돌아온 여공들도, 어머니들도, 소녀들도 거울 앞에서 조심스레 귀걸이를 꺼내봤다. 비록 도금이 벗겨진 싸구려였을지라도, 그것을 귀에 걸치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이 피어났다. 여성에게 보석이란 단순한 치장이 아니라, 고단한 하루 속 ‘나’를 기억하게 해주는 작은 조각이었다. 남루한 셔츠 위에 은색 브로치를 달던 시절, 그건 누군가에게 ‘오늘도 나를 잊지 않았어’라는 표시였다.
5. 잊히지 않는 이야기들
1981년, 청계천 근처에서 보석 세공을 배워 독립한 여성 장인이 있었다. 그녀는 하루 15시간씩 도면을 그리고, 작은 루페로 세공하면서 “내 손이 사람들의 사랑을 담는 그릇이 된다면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이름은 역사에 남지 않았지만, 그녀가 만든 반지는 수많은 부부의 손가락에 남았다. 1986년 아시안게임 전후, 외화벌이를 위한 보석 수출이 늘면서 종로 일대는 ‘골드러시’처럼 붐볐다. 그 한복판에서 “한 돈 짜리 반지라도, 정성이 담기면 열 돈짜리보다 귀하다”라고 말하던 노점 금은방 주인의 말은 아직도 그 골목을 기억하게 한다.
6. 그 반지는 어디에 있을까?
지금은 수많은 온라인 쇼핑몰과 브랜드가 넘쳐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금은방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고른다. 어쩌면 그건, 반지를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의 약속을 사는 것이 아닐까. 할머니가 물려준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며, 딸은 묻는다. “이건 언제 샀어요?” “아버지가… 너 태어나기 전, 나한테 처음 끼워준 반지야.” 그리고 우리는 안다. 보석은 시간이 흘러도 닳지 않는, 사람의 기억을 담는 유리병 같은 것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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