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석

12화 . "보석에 비친 고려 여성의 삶, 시장에서 궁궐까지, 그 빛나는 이야기“

반응형

■ 고려의 아침, 은은한 빛으로 깨어나다

고려시대의 하루는 해가 뜨는 순간부터 달라졌다. 특히 개경(지금의 개성)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시장의 북적임과 향신료 냄새가 골목마다 퍼져 있었다. 그곳엔 장신구를 사고파는 상인, 비단 옷감을 고르는 부인들, 귀금속을 감정하는 장인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여성들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유행을 선도하고, 가족의 체면을 책임지는 실질적인 ‘스타일 디렉터’였다.

■ 보석은 신분, 의류는 격조

고려 여성들이 즐겨 착용하던 장신구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은제 귀걸이, 유리로 만든 비녀, 옥을 세공한 반지는 ‘나는 누구인가’를 말하는 무언의 언어였다. 특히 상류층 여성들은 머리 위에 금장식과 칠보 화관을 올렸고, 귀에는 유리옥이 주렁주렁 달린 귀고리를 걸었다. 이러한 장신구는 옷과의 조화를 중시했는데, 옥색 비단에 붉은 비녀, 자주색 치마에 은반지 등, 조선보다 훨씬 더 화려한 색감이 고려시대 여성 패션의 특징이었다.

■ 장터, 여성의 정보교환소

고려 여성들은 단지 집안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장터는 그들의 또 다른 무대였다. 시장 한편에는 ‘보석상’이라 불리는 장인들이 직접 만든 은반지, 유리옥 목걸이, 산호로 만든 머리 장식 등을 진열해 두었고, 여성들은 이곳에서 최신 유행을 파악하고, 친구들과 정보를 교환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장터에서 구매한 보석을 집에서 '개조'하는 일이 흔했다는 것이다. 은을 녹여 새로운 형태로 바꾸거나, 목걸이 줄을 진주로 교체하는 등 창의적인 DIY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장신구는 단순한 소비재가 아닌, 창작의 대상이었다.

■ 주거 속의 사치, 보석함

귀족 여성의 방에는 보석함이 필수였다. 자개로 장식된 나무 상자 안에는 세대를 물려받은 금귀걸이, 어머니에게 받은 옥비녀, 딸을 위해 모아둔 진주 목걸이 등이 정갈히 놓여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비밀 보석함’이라는 공간도 존재했단 점이다. 여성들끼리만 아는 작은 서랍에, 애틋한 감정이 담긴 장신구—연인의 선물, 혼례 전 야경에서 산 금반지—들을 따로 보관했다는 기록이 있다.

■ 음식과 보석? 연결고리가 있다

고려 여성의 식생활에도 보석이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귀족 여성들은 피부톤을 밝게 유지하기 위해 흰 팥죽, 백복령으로 만든 떡, 연근과 꿀로 만든 단자 등을 즐겼다. 이는 곧 보석의 색감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붉은 루비 비녀와 대비되는 창백한 피부, 푸른 유리옥 귀걸이에 어울리는 맑은 눈빛을 위한 미식이었다. 이처럼 음식조차 아름다움을 위한 전략적 요소였다.

■ 숨은 이야기, ‘사라진 귀걸이 사건’

고려 중기의 한 기록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등장한다. 어느 귀족 가문에서 잔치가 끝난 뒤, 여주인이 애지중지하던 청옥 귀걸이 한 짝이 사라진 것이다. 하녀들이 의심받았고, 결국 한 궁녀의 방에서 그것이 발견되었지만, 조사 결과 그녀는 훔친 것이 아니라 ‘닮은 것을 착용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당시 귀걸이 하나로도 감정이 격해지고, 오해가 생기던 시대였던 만큼, 보석은 단순한 장신구를 넘어 감정과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였다.

■ 고려 여성의 보석, 그 너머의 의미

보석은 단순히 반짝이는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당시 여성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었고, 신분과 문화를 드러내는 도구였다. 고려의 여성들은 그 반짝임을 통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지키고, 이어갔다. 오늘날 박물관 유리 너머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그 보석들은, 그들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강인했는지를 조용히 말해준다.

반응형